모차르트
link  엄요안나   2021-07-26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는 빚더미 속에서 35세의 나이로 죽었다. 왜 모차르트는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던 것일까?

모차르트는 이전 음악가들과 달리 경제적인 독립을 처음으로 시도한 예술가였다. 모차르트 이전의 음악가들은 모두 궁정이나 교회에
전속되어 고정적인 급료를 받으며 생활을 영위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편안하고 안정적이었지만 급료가 풍족한 편도 아니었고 사회적
계급 역시 시종과 별 차이가 없는 사회적 지위에 머물렀다.

모차르트는 20세가 넘어서 음악적인 성공을 꿈꾸며 당시 유럽의 수도인 파리에서 활동을 꾀한다. 그는 아주 어렸을 적 파리에서 신동
으로서 대단한 선풍을 일으켰던 경험이 있었기에 상당한 기대를 품고 파리로 진출했다. 하지만 20세가 넘은 청년 모차르트는 피리의
사교계에서는 더 이상 천재가 아니었고 파티의 눈요깃감도 되질 못했다.

그는 파리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맞았으며 처절한 실패와 좌절 속에서 고향 잘츠브르크로 돌아왔다. 그 후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
와의 갈등이 심화되었는데 만하임에서 만난 첫사랑 콘스탄체와 결혼을 하려 했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리고 모차르트
소속에 관한 문제였는데 아버지는 아들이 잘츠부르크 교회에 소속되어 작곡과 연주를 하며 고정적인 급료를 받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
를 바랐다. 그러나 이들은 대주교 콜로레도와 사사건건 충돌하며 안정적인 궁정악사 자리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모차르트는 드디어 아버지의 간절한 염원을 물리치고 그에게는 너무 작은 잘츠부르크를 떠나서 더 큰 음악시장이었던 비엔나로 향했다.
그가 비엔나로 간것은 1781년, 그의 나이 25세 때였다. 그리고 꼭 10년 후인 1791년에 그는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비엔나에서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아무런 경제적인 후원없이 생계를 꾸려가야 했다. 모자르트을 아꼈던 하이든이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천재 모차르트가 어느 궁정에서도 지위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라는 개탄조의 글을 남긴
것도 이무렵 이었다.

모차르트에게 처음으로 귀족이나 왕족 혹은 교회로부터 받은 돈이 아닌 순수 공연으로 수입이 발생한 것은 그가 죽기 직전에 초연한
오페라 가 대중적 인기를 얻어 흥행에 성공하고부터이다.

작품도 궁정극장이 아닌 일반 대중을 위한 민중극장에서 공연되었다. 의 흥행으로 돈이 좀 들어오게 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그는 의뢰받은 진혼곡을 다 끝내지 못한 채 짧은 생을 마감했다. 아마도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더욱 주옥같은 음악작품을 남기며
그동안의 어려웠던 삶을 청산하고 경제적으로도 좀더 부유하게 지냈을지도 모르겠다.

돌이켜 생각하면 모차르트는 엄청난 경제적 가치를 창출했지만 그는 자신의 빛도 못 갚고 죽었다. 모차르트의 연주회에 두어 명밖에
관객이 없었을 정도로 당시 비엔나 사람들은 그의 음악의 위대함을 깨닫지 못했다. 예술가들의 경제적 궁핍이 혹시 그들의 예술세계를
이해 못하고 온 우리 자신들 때문은 아닌지 자문해 볼 일이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더이상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된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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